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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ther Side
시계태엽 오렌지 본문
고전틱한 음악과 효과음. 내용만은 굉장히 신선하다.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며 그가 범죄를 저지르다 배신을 당해 수감되고 정신치료를 통해 다시 사회로 나온다는 영화다.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감독이 제작한 영화다.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감옥에 보낸뒤 정신치료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굉장히 직설적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사회라는 단어는 굉장히 모호하다. 국가라고 하는 존재가 영향력이 어디까지 퍼지는가, 혹은 국경이 어디까지인가라고 말하며
그 경계가 논란이 되기도 하는데 사회라는 개념은 그 물리적 경계마저도 없다. 그를 치료 하려고 하는 세뇌방식은 드라마 로스트에서 특정인을
세뇌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팅커 솔저 스파이 에서도 스파이를 잡아 정신을 교란시키는 소재료 사용되기도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아이들을
하얀 방에 가둔 채 특정 반응을 유도하며 조건반사를 만들어내 계급사회에서 계급을 정확히 나누고 그들을 노동계급에 맞추도록 훈련시킨가.
그가 테스트를 마친 뒤에 특정인에게 구타와 욕설을 당하는데 그가 정당방위를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친다. 왜 그를 공격하는 누군가를
처벌하지 않는가는, 그가 밖에서 누군가를 공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째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싸워야하는 상황에서 싸우는 것 역시
처벌되고 통제되어야 하냐는 것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동서양의 인식도 이에 한몫하는데,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사람이 윤리적/도덕적/법적
규율을 벗어나 이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에 서양인은 대상을 탓하지만 동양인은 주변의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 그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시각자료를 볼때 배경을 인식하는 동양인의 시선을 설명해준다 )
목사는 말한다. 그에게 도덕적 윤리적 선택권이 없는것이 아니냐. 그 스스로 폭력과 살인에 저항해야 하는데 그는 단지 훈련되어 아무 행동도 할 수
없는것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상대방을 해치며 행위를 하는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은 어디에서도 일어난다.
단지 그가 사회적 약자이기에 오히려 처벌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그가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는 의사회 관계자들. 그를 폭행하는 경찰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노인들의 폭행이라니. 과연 그들은 사회인가 사회가 아닌가 ?
보라_ 도둑질과 살인은 나쁜 것이다.
사회속에서 최소한의 삶을 위하여 그들에게 복지를 해주어야 한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부를 쌓을 뿐이다. 이것은 경쟁의 자유다.
사회의 약자에게 최소한의 보장을 해줄 복지를 해 줄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빈부격차는 심해진다.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 도둑질을 하게 된다.
그럼 그들은 폭력을 저질렀기 때문에 단순히 처벌받아야 하는가?
사회라는 단어에 그 몫을 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지나치게 미화된 경향을 갖는다. 단지 그들은 누군가를 통제하고싶은 욕망을 지닌것이 아닐까.
그가 범죄를 저지른것을 미화할 수는 절대 없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피해자들을 만나며 겪은 이야기에서 그 피해자들의 처절한
복수와 함께 그들의 폭력성도 강조된다. 흔하게 나오는 범죄영화에선 마치 그들에게 선생마냥 인생에 대해 가르친답시고
그저 그사람이 약해졌을때에 그인간을 총과 칼로 죽이려고 하거나 감금하고 폭행하며 사회의 정의가 실현된 것 마냥 말하고 영화를 마무리한다.
종교적인 개념으로 그를 용서하라는 것은 이상적인 말에 불과하지만, 그 누군가의 행위 자체도 미화되서는 안된다.
피해자의 삶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아니면서, 그다지 없는 철학을 긁어모아서 그저 범죄자를 연기한 배우를 벌한다고 해서
그 감독이 사회에 대단한 역할을 한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죄수나 범죄자를 영화에서 표현하며 그들의 감정이나 모습에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지만
그 대상들을 지나치게 미화한 탓에 영화가 끝나버리면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그저 인터넷에는 흥행속에 영화에서 탄탄한 몸을 만든 남자 배우나 노출이 심하거나 얼굴이 예쁜 배우의 기사가 넘칠뿐이지
그어떤 메세지도 던지지 못하고 그럴 용기나 시선자체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영화에선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호한 경계와, 사회로 환원시키려는 정부나 특정인드들의 눈물나는 노력을 너머
(비록 그들이 사람의 자유나 윤리따위에는 관심도 없이 범죄율 수치에만 목을 매더라도)
그들을 사회에서 받으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지적하고 있다. 사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사회가 원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돌려보낸다면 어떨까.
영화속에서 전쟁영상과 함께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마치 찰리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전쟁 영상 속에서 참혹함을 보여주는 그것들은 진실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
인간의 폭력성을 마주하자는 결의? 혹은 적국에 대한 분노? 누군가는 프로파간다로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으로 뒤바꿔놓는다.
마지막에도 자신의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그를 이용하려 하고, 그가 원하던 음악을 듣는 순간 그는 나체의 여성과
바닥에 뒹굴며 웃음속에 영화가 마무리되며 그는 치료되었다 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