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퓰리처상 사진전

푸른세계_2 2014. 8. 4. 12:57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하는 퓰리처상 사진전을 관람했다. 더운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수의 관람객들이 입장해 본인은 좀 놀랐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기 때문일까 사진전이라는 아이템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영향을 미치는 이미지 때문일까. SNS의 의식때문일까.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좀 의아하다고 느낀다.

 이전 사진집을 보다가 퓰리처상 사진집이라는 책을 보고 살까말까 망설이다, 최근에 수상을 받은 보도사진분야의 사진이 업데이트 된것인지에 대해 알 수 없었기에 사는것을 망설였는데, 그렇기에 이번 전시가 조금 더 기대치가 높았던것 때문일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전시는 아니었다. 퓰리처상 사진을 수상하거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좋았는데, 그것 이외에 그 전시를 보러가 이유가 있었는가에 대해선 조금 의구심이 든다. 전시가 끝나고 받았던 느낌에 대해선 '사진'이외에 정보를 얻을만한 경로가 없다고 생각됐다. 200여점이 넘는 방대한 양의 사진 곁에는 짧은 설명만 존재하고, 3000원의 대여료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도 가능하고, 현장에서 빌리는것도가능하다)를 내고 다운받았던 오디오가이드에선 비록 몇심점만의 설명. 그것도 그닥 많지 않은 내용의 설명뿐이었다. 사진전에 입장한 사람이 너무 많기에 (주말에 비하면 턱없어 적을수도 있지만 ) 사진 한장을 천천히 보기에도 좀 벅찬 수준이었다. 홈페이지나 구매를 한 사람에 한해서라도 현재 입장한 사람들의 수나 상태를 온라인으로 알려줬다면, 전시를 보길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나은 전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진 않았을까? 전시 후반부에는 사람들이 퍼져있어서 덜하긴 하지만, 입구에선 사람들이 미친듯이 몰려서 사진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퓰리처 상이 가지는 특성에 대해 조금 더 사진들과 관련해서 설명을 붙이는건 어떠했을까. 각 사진들이 퓰리처 상을 받은 이유에 대해 당시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연계지어 그 사진의 가치에 대해 심도있는 정보를 제공했다면 더 재밌을수도 있었을텐데. 저걸 다 외우고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줄줄말하던 도슨트가 신기했는데, 그 분도 사진 한장한장을 일일이 설명하기엔 벅차겠지만 년도별 이외에 사진들의 카테고리를 묶어서 이 사진들은 어떤 시대에 어떤 영향을받아서 수상을 했습니다- 라면 조금 더 좋았을걸. ( 어렴풋이 들었을때 설명이 재밌긴했는데 몇십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닌탓에 그곳에 끼고싶은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오디오가이드는 대체 어디에 써먹는게냐.)

기존 라이프전 사진전이 재밌었던건, 조금이나마 영화나 인터넷으로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은탓도 있겠지만 (포토저널리즘의 발달의 바탕이 되는건 당시 영상매체가 퍼지기 전, 사진의 발달과 맞물려 인쇄매체가 미국에 커다란 파급력과 정보전달로서 엄청난 효과를 거두었기에 사진의 발달에 있어서 라이프를 떼어놓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라이프지의 성격을 조금 더 드러낸 전시였기때문은 아닐까. 비교적 사람들도 적은시간에 관람했기 때문에 여유롭게 볼 수도 있었고 그곳의 오디오가이드는 전시에서 볼 수 없는 라이프지나 그때 상황에 대해 설명해준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퓰리처상이 미국내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나, 미국의 언론사를 통해서 일을 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특성 때문에, 퓰리처라면 생각되는 전세계적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보여준 전시라고 생각된다.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도 흑인 대통령의 당선 이외에 다른 상징성이 있는가에 대해선 잘모르겠는데, 빗속의 오바마라던가, 얼굴에 파리가 앉은 사진이 대체 왜 수상을 받은건지 이해가 안된다. 미국에서 권위있는 보도 상이라면 뭐 당연할수도 있겠지만. 강가에서 아이를 구조하는 남자의 모습도 생각만큼 대단한것인지는 모르겠다. 산불이 난 뒤 소화작업을 하던 소방수의 실루엣까지. 전시의 부분부분에 있어선 이 사진전이 조금 미국 중심의 전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한 나라에서 전시한 포토저널리즘 수상이라고나 할까.

 

 뱅뱅클럽이라는 책과 영화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사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좋았다. 언론과 여론의 질타를 이기지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수단의 독수리와 소녀를 담았던 케빈카터의 사진은 많이 보아왔기에 조금 익숙한 감도 있었다. 특히 바로 옆에 전시된 영상에선 그를 맹목적으로 탓하던 언론과 여론들을 비판하는 관계자의 말에 공감했다. 그들이 케빈카터에게 그렇게 비난을 할만큼의 자격이 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기에 그의 죽음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가 죽은뒤에 그 사진을 대단하다고 느끼다니 참 이중적인 모습이 아닐까.

내전의 상황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불을 지른 후 그 사람이 살아서 도망가는 모습을 촬영한 그렉 마리노비치의 사진을 직접본것은 처음이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구나, 더불에 그 모습을 소름끼치게 전달하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 끌리지만 두려운 느낌을 갖는다. 또 그 사진을 찍는 사진가에 대해서도. 영화에서 케빈카터의 인터뷰 내용중 '좋은 사진은 언제나 논란이 따르기 마련이다. 단순한 풍경 사진이 아니니까.'라고 말한다. 좋은 사진은 보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사진 안에서도 사건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모호한 경계선에 대해서 묻는다.

 

디지털시대로 변함에 있어서 퓰리처상 사진전은 사진이 지니던 역사성에 대해선 이미 초월했을지도 모른다. 디지털로 찍기 쉬워졌다고는 하지만 세계곳곳의 어두운 곳과 관심이 필요한 곳에서 그곳을 담아내려는 사람의 노력에 대해선 변함이 없을것이다. 사진전이라고 해서 역사적인 특성을 가지고 꼭 아날로그 방식으로 인화를 해야한다는 본인의 바램은 이미 구시대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디지털로 인해 더욱 다양해졌고 빨라졌으며 더 많은 가망성을 가져오는것은 아닐까. 단지 이번 사진전은 그 위치가 애매했던것은 아닐까. 아마 디지털로 전환되어지는 현시대의 혼란이 전시에 함께 보여졌는지도 모른다. 현대를 보여주던 전시 부분에선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사진의 설명에 관해선 전시보단 전시 앞의 책에 더 많은 정보가 담긴것같은 느낌은 왜일까. 조금 아쉬웠던 전시.

 

 

 

P.S )콜롬비아의 화산폭발로 인해 잔해에 빠진 채 죽어가던 소녀를 찍은 사진이 있다. 오염된 물질로 인해 그 소녀의 눈동자는 모두 검은색이 되어버렸다. '프랑크 푸르니에'라는 작가는 그 소녀의 모습을 찍고 세계보도사진상을 받는 과정에서 많은 심적 부담과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사진상에 대해선 사진과 더불어 다양한 이면이 존재한다. 퓰리처상 사진을 받은 그 사진보단 이 작가의 사진이 좀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내용과 관련해선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를 보길.

 

P.S 2) 몇몇 외국인이 보이는데, 사진의 설명에는 영어로 된 설명이 없다. 어떤 사람은 인쇄된 설명을 보며 사진전을 감상하던데, 조금 더 편하게는 안될까. 아, 전시전에 수상작들의 설명을 인쇄해서 가져간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