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영화 리뷰

작은 정원 - 2023. 다큐멘터리.

푸른세계_2 2023. 7. 7. 00:54

 

 

외부인의 시선

 

 

 명주동은 관광지로만 가끔 찾아갔다. 오래전 인근 공사가 시작되기 전 기억이 조금 있지만, 동네 안을 걸어보는 건 꽤 드물었다. 담장허물기 사업으로 집을 가리던 돌들이 사라지고 텃밭이 자리잡았다. 군데군데 심은 풀과 꽃은 계절을 알려준다.   특히 붐이었던 '도시재생'은 생기를 불어넣는다곤 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벽엔 형형색색의 페인트로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지고, 돌과 나무로 골목 군데군데를 꾸며놓은 모습은 동심을 자극했다. 관광지와 어릴적 경험의 사이 그 어딘가라고 할까. 

 그러나 나는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몰랐다. 건너듣기론 갑자기 몰린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사진을 찍어서 피곤하다는 이야기였다. 근처 유명해진 카페들 앞은 수 많은 인파가 줄을 서거나 사진을 찍기 바빴는데, 그 지역의 색깔과는 조금 이질감이 느껴졌다. 을지로가 기존의 모습을 남긴 채 내부를 바꾸면서 힙지로로 거듭나며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도 그 조명은 과거와 현재 어딘가의 다리처럼 느껴졌지만, 이곳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시간에 따라 탈바꿈하듯 온전히 모습을 바꾼다는 느낌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엔 1호선만큼은 아니지만 머리가 히끗하신 분들이 쉽게 보인다. 명주동에서도 카페에 앉아 있을 땐 잘 보이지 않지만, 가끔 주민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슬렁 거리며 천천히 골목을 걸어다닌다. 과연 이곳에서 살아가는, 살아왔던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기억하며 살아갈까? 

 

 

이미지와 시간

 

 서울의 어느곳과는 조금 다른 풍경. 사람이 별로 없지만 풀들이 군데군데 솟아나고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집, 영화에 등장했던 카페. 그렇게 풍경을 쓸어가던 카메라는 할머니들을 바라본다. '이건 누가 가꾸는걸까?' 싶었던 작은 풀과 꽃을 손질하는 할머니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들은 영화를 만든다. 개성이 가득해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이 만든 영상을 바라보는 할머니들의 눈빛과 표정은 순수한 어느 시절을 추억케 한다. 

 그러나 영화를 찍는 그 순간엔느 모두가 진지하다. 연기를 지도하고, 컷을 외친다. 시간을 입고 있던 꽃과 풀처럼 사람들의 복장과 모습이 변해간다. 완성된 영화를 바라보는 그 순간엔 다시금 미소짓는다. 그리고 그 영화는 상을 탄다.

 되돌아온 할머니들은 계속 나아간다. 그리고 영화와 다른,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오래 전 결혼을 할 때 만나게 된 순간, 그때 있었던 건물들. 지금의 결혼생활이나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 꽃과 풀을 바닥에 앉아 가꾸며 옆 집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들은 마치 옆집 할머니의 일상을 아무런 방패도 없이 마주하게 된다. 자신들과의 추억을 물으며,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잊고 있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릴적 할머니에 대한 기억. 때론 할아버지와 티격태격 했지만, 그럼에도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함께했다. 괜시리 손자에게 뭘 물어보시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요리를 해주셨다. 시레기 국을 처음 들었을 때, "쓰레기요?"하고 놀란 말로 물었더니 호호 하고 웃으시면서 시레기라고 말씀하셨고, 그게 시레기 국의 첫 이미지였다. 지금에서 나는 그때의 할머니와 나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그때의 할머니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뚜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래도 색깔은 오후의 햇살처럼 따스했다. 

 

 

기록과 기억 그 사이

 

 

"이게 좋은게, 내가 가더라도 뭐가 하나 남는다 하는게 더 열심히 사진을 찍고 그래요. 뭐가 남아 있잖아"

 

  오래된 흑백사진을 쥔 손에는 주름이 있다. 사진은 옛날의 어느시점에 익숙한 옷차림을 담고있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디지털 컬러로 담긴 영상은 선명하다. 이 둘의 이미지에는 긴 시간이 있다. 먹는 음식도, 옷도, 그리고 주변의 풍경도 모두 변했다. 그 사람 자신도 아마 변했을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외부에서 바라보는 '노인'이 아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생기를 띄고 있다. 

 나 역시 시간이 지나면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마치 한 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기술들을 접하면서 때로 당황하고 어려워할수도 있다. 그런데 먼 훗날의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기록하고 사람들과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을까. 아직 인생을 논하기엔 경험이 부족한지라 잘 모르겠다만, 저 분들이 꽤 멋지다고 느껴졌다. 

 

 기록한다는 건 그 중요성이 언제 보일지 모르지만, 단순한 기록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더 들어가 그 사람들의 삶을 마주한다는 건 유형으로 보이고 비싼 부동산과는 전혀 다르다. 대문을 열고 옆집 사람이 밥을 먹었는지, 요즘 뭘 하고 지내는지 이야기를 나눠가는 10년의 세월을 과연 어떻게 이름지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또 주변 이웃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기억했던 그때

 

 

 어릴적 내가 살던 곳 뒤쪽엔 뚝방이 있었다. 계단이 아닌 가파른 비탈길은 동네에 살던 친구들과 눈썰매를 타기에 좋았고, 봄과 여름이면 풀들이 자라고 계절에 따라 코스모스가 길게 피어나면서 바람이 불면 풀소리가 나던 곳이었다. 시간에 따라 날씨가 온전히 느껴졌고,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흙과 섞여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리면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인근이 계발 되면서 그곳은 도로가 들어섰다. 거미와 풀벌레가 있던 그 곳은 여름이면 뜨겁게 달아오르는 아스팔트가 뒤덮였고, 가파르던 비탈은 깔끔한 계단이 자리잡았다. 그 위에 꽃이 피던 길은 이제 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곳이 됐다. 나 역시 그 길을 가끔 이용하곤 하지만, 지나가버린 추억을 붙잡아 두기엔 사진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그곳엔 한가지가 더 있었다. 나무로 지어진 노인정. 할아버지들이 그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동네 어르신들끼리 모여서 계절에 따라 먹을걸 들고 오거나 장기를 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풍경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 다큐멘터리는 정답을 보여주진 않는다. 다만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하나의 방식을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과 연결짓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장소를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지 영화라는 공통점으로 그들을 하나의 또 다른 마을로 묶는다. 그들이 언급한 삶과 죽음은 도처에 널려있다. 그래서 먼 이야기가 아닌, 바로 옆 동네 혹은 내가 살아가는 그곳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과연 내가 사는곳은 저 명주동처럼 사람들이 서로 생기를 지닌 채 살아가는 곳일까. 아니면 그저 머물러있는지, 혹은 시간이 흐르는지 잘 구분할 수 없는 곳일까. 영화를 보았으니, 카메라를 하나 들고 주변을 거닐며 조금 더 자세히 봐야겠다.

 

지금강릉에선 독립영화극장 신영에서 상영중이며, 다른 지역에서도 상영중이다. 동네, 인생, 나이듦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