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전시

또 다른 현실 전. 고양아람누리

푸른세계_2 2011. 11. 3. 16:29



전시소개  
2011년 고양아람미술관에서는 한국과 호주의 수교 50주년을 기념하여
호주의 대표적인 미디어아트 전시 기획 기관인 ‘Asialink (아시아링크)’와
공동 기획한 <Selectively Revealed : 또 다른 현실>을 개최한다. 
전시에 참여한 한국과 호주 17팀은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와 노출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선정하여 공적영역에 있는 타인의 시선과 사적영역에 있는
개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성을 미디어를 통해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최근 현대미술의 주요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 이다.

참여작가
피터 올웨스트 (Peter Alwast), 캐더린 벨 (Catherine Bell), 줄리아 번스 (Julia Burns), 페넬로페 캐인 (penelope cain), 아나스타시아 클로스 (Anastasia Klose), 이소벨 노웰스&반 소워와인 (Isobel Knowles& Van Sowerwine), 제스 맥네일 (Jess MacNeil), 앤 스콧 윌슨 (Anna Scott Wilson), 마이클제브로스 (Michael Zavros), 크리스토퍼 풀햄 (Christoper Fulham), 안젤리카 메시티, Angelica Mesiti, 미스&미스터 (Ms&Mr)
박현두 (Park Hyun Doo), 심철웅 (Sim Cheol Woong), 양아치 (Yangachi), 이진준 (Lee Jinjoon) , 장지아 (Chang Jia)

작품들에 대해 사전조사를 했다면 좋았을텐데. 평일 오후 늦게까지 도슨트가 있는줄 알았는데 아침 10시.11시.오후2시를 제외하고는 도슨트가 없다. 한국작가분들의 작품옆엔 작가의 이름과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의도가 적혀 있어서 작품을 보기전에 본다면 도움이 될텐데, 외국작가분들의 작품옆에는 작품에 대한 소개는 없고 사운드나 이미지정보에 관한 간략한 설명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얻게되는 팜플렛에는 작가 대부분이 빠져있을 뿐더러 포함되어 있는 작품에도 설명은 아주 간략하게만 되어 있어서 가기전에 약간의 조사가 필수적이라고 느꼈다. 문화역서울284의 경우에 설치미술작품들 주변에 앉아있던 분들에게 여쭤보면 작품에 대한 설명.의도.표현방식이나 작가분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던데, 여기선 작품들에 대해 물으면 도슨트가 따로 있다고만 말하고 기타 다른 정보는 얻을수가 없었다. 도난이나 훼손을 방지하려는 건지 이리저리 옮겨다닐뿐이었다. 
 작품에 대한 정보는 찾아봐야할듯. 도슨트를 듣거나. 여기엔 개인적인 느낌만 적는다.
페넬로페 케인 ( Panelope Cain ) 의 작품. 말단사원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수많은 남자가 주는 서류더미들을 받는다. 정리하다 못해 바닥에 내려놓으며 분리하려고 하면 또 찾아오고 또 찾아와서 서류 뭉치만 한가득 쌓인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그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점차 그 서류들에 의해 둘러싸이게 되고 이윽고 그녀는 스테이플러로 그 종이들을 서로 결박하는가 하더니 서류철로 주변을 틀어막아서 하나의 이글루를 만들고, 그 뒤에 숨어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다. 회사의 업무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그 어두운 이글루 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기전에 봤던 정보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가 모호해져간다는 설명이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그중 하나고.
싸이월드가 유명해지고 2-3년쯤 지날때였던가 한참 싸이허세가 무르익을때 즈음에 느꼈던 아주 이상한 느낌.그리고 지금도 느끼는것은  개인적인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그 공간은 어쩌면 모두의 공간일수도 있다는 것.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 역시 모든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어찌 보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자신에게 솔직하기 힘들고 타인의 관심에 의지하는 수동적인 상태에 놓인다고 생각됐다. 그러니 어쩌면 그곳은 내공간도 아니고 타인공간도 아닌 어중간한 공공장소랄까. 물론 추억을 만들어 간다던가 말 그대로 앨범의 사진첩처럼 아름답게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자신의 공간은 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은 타인의 관심에 의지하기 때문에. 언젠가 외로움을 느낄 때 그 관심이 위로가 될수도 있지만 독이 될수도 있다는 것.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시간이 오래 흐르다 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것들까지 보여주기 위한 식으로 틀어져버리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그래서 너무 이질적인 공간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서비스프로그램은 약간은 다르다고 생각했나. 연속적인 공간이기에 관심을 가져서 내가 찾아가기 보다는 자동으로 업데이트 되니 손가락 몇번만 움직이면 수 많은 정보가 오고가고, 인맥관리도 편하고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 분명 이건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국 사람들과도 쉽게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참 좋다 이거. 선거철 (특히 우리나라)라던가 특정 기관에 어느정도 분리되어 있다보니 그 속도와 전파력의 위력은 엄청나고. 이것 자체가 거대한 것이겠지.
 근데 이것도 타인의 관심에 의지한다고 생각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트위터에 자신의 자살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엄청난 친구의 숫자. 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하나 말리지 않아서 결국 그사람이 죽게되는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SNS서비스에 관해 비판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뭐 그건 어쩌면 개인의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일수도 있지만 팔로우만으로 서로 관심을 갖게된다고 생각하는 관계니 문제가 없는것은 아니지.  ( 여담이지만, 이런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특히 인터넷. 이런것들의 발전 속도를 사람이 쫒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에 사람이 맞춰지게 되고, 더욱 빠르고 방대한 정보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남들 하는대로 그저 정보를 모으기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길 원하고 관심을 어찌갖는지 모르고 사람과 친해지는 것까지 모두 그것에 맏겨버리는 그런상태랄까.)
 저것에서 보았던 서류 뭉치들이,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말 그대로 말단 직원이 일하는 공간속에서 마치 기계처럼 일만하고 그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의 업무능력이 중요할 뿐이고, 그에겐 관심없고 사생활도 없는 그런 상황속에서 사라져버리는듯한 느낌일수도 있을까. 페북이나 트윗이나 미니홈피나 기타 모든것도 어쩌면 타인의 관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끌어모아 자신의 외형에 모자이크 하듯 덕지덕지 붙여나가는 정보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정보들 속에 숨어서 결국 내가 사라져버리는 그런 상태를 ...표현한건 아닐까. 
 작품 하나 더 . 한 건물로 회사원이 다가가더니 자신의 몸에 건물색과 비슷한 종이를 차례차례 붙여나간다. 주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엿보기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또 붙여나가고 결국은 얼굴을 제외하고 모두 종이를 붙인 채 건물벽에 더욱 바짝 붙어서 그렇게 건물에 녹아든다.
뭘까 이건. 아마도 이작품 내가 저런모습의 회사원이었다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겠지. 아침에 출근해 일하고 저녁에 들어와 저녁먹고 자고 다시 출근하는 그곳에 자신이 녹아든다고 생각한걸까. 이것도 한편으로 자신이 아니라 회사(업무의 장소. 회사건물)에 녹아들어 하나의 부속처럼 여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퇴근시간이 다가오면 또 그 건물에서 떨어져나와서 집으로 향할까. 그 남성이 얼굴을 가리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최소한 살아있다는 증거일까. 그가 종이를 하나하나 붙일때에도 주변에는 수 많은 샐러리맨들이 자나가고 그를 바라보기도 하고 그냥 걷기도 하고 카메라를 바라보기도 한다. 아. 근데 저걸 오랫동안 봤다면 그에게 덤벼드는건 아닐까. 아마 집에가서 자신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는건 아닐까 상상해본다. 업무장소라는게 공적인 장소이긴 하지만, 최소한의 사생활도 없는듯 하고, 최소한 그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로봇처럼 대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포스터에 나오던 여자 아이가 나온다. 레이디가가 파파라찌를 틀어놓은 티비를 보면서, 귀여운미키마우스 머리띠를 하고 커다란 선글라스. 분홍색의 상의와 발랄해 보이는 치마. 춤추는 모습이 너무너무 귀엽다. 그리고 그 곁에서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그 소녀에게 관심을 갖는듯 마는듯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한다.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분명 집에서 홈비디오라고 불리는 그런 작품인가. 아이는 이쁘게 춤을 추고 주변 어르신들은 그런 아이를 보면서 박수치고 좋아하고 웃고 떠들어야 하는데, 아이는 춤을추고 노래부르지만 산만한 작업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특히나 화려한 그 소녀의 외형에 비해 선글라스로 가려져서 그런지. 아니면 강렬한 대중음악에 맞추어 부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웃는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다. 무언가 남자에게 요구하고 다시 춤추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기 바쁘다. 남자는 그런 딸을 가끔 바라볼뿐이고 자신의 그림을 열심히 그린다. 작업실과는 어울리지만 딸과 노래와 티비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느낌이었다. 가족이라는 틀속에 음. 저건 사생활일까 아니면 공적영역일까. 저걸 보고있는 이곳은 공적인데 보고있는건 사적영역 같기도 한데. 
 무슨 도서관의 자료검색컴퓨터 처럼 외부에 액정이 하나 있고, 그 앞에 의자에 앉아서 하는 무언가가 있다. 재밌는것.
그 안에있는 모니터를 바라보면 옆에 위치한 카메라가 내 얼굴을 잡고, 모니터 안에 있는 케릭터를 조종할 수 있다. 숲에 누워있는 케릭터는 내가 마우스를 움직이면 그때 얼굴과 합성되어져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주변에 반짝거리는 것들을 클릭하면 움직이기 시작한다. 왼쪽의 수풀을 클릭하면 토끼를 쫒아가고, 위를 보면 새의 알이 있고, 원숭이의 꼬리가 있다. 하나하나 클릭할때마다 조각난 색종이들로 이루어진 세계처럼 그 특유의 동심세계로 주인공을 인도한다. 그 장면은 동시에 바깥에서 볼 수 있도록 전시된다. 이 작품이 특이했던건, 사람이 직접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그 전개. 무엇을 선택하던간에 동화와는 상관없는 현실로 인도한다. ( 한편의 잔혹동화랄까? ) 그래서 어느 나락에 다가가 잔인한 선택을 하게되고 실망한 주인공은 그 모든게 꿈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에 놓인다. 무얼 선택하건 다시 꿈이다. 항상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있다.
이것저것 마구 떠오른다. 어른이 참여하면서 그 어른을 동심으로 인도하고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결국 동심이란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듯한 말. 어쩌면 환상에 지나지 않는걸까. 어른들의 동심의, 그 호기심을 채워나갈려고 선택하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쨋건 간에 그 모든 동심.환상속에서 선택이라는걸 하게되고 그 선택은 언제나 비관적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모든건 다시 꿈으로 돌아간다. 그 케릭터의 얼굴이 진짜 나 같을까. 그래서 그런 동심도 악몽도 모두 꿈으로 되돌려버리는 그 힘. 현실감. 내가 선택한 어른의 현실이 모두 꿈이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비관적으로 끝날 수 있는 그런 일들이 꿈으로 끝나는게 가장 행복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차라리 꿈으로 끝나 버린다면 기분이 찝찝한것으로 끝날테니까.
하나의 선택을 할때마다 느낄것이다. 처음엔 아, 다른 선택을 하면 좋은 결말이 있지 않을까 싶지만 수행착오를 거쳐서 알게되는건 그런건 없을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혹시모를 희망인지, 아니면 그 끝이 낭떠러지인걸 알면서도 걸어가는 한명의 사람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쨋건 그 참여자는 마우스를 움직여 선택을 하게되고, 얼마 되지 않는 선택권 속에서 모든 결말에 이르렀을때의 허탈감. 아주 찝찝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것을 생각한 그 사람에게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작품이다.
 침대에 누워있는 소년을 표현한 것. 오 이거 멋지다. 
티비를 옆으로 뉘여서 청년의 얼굴과 상반신만을 전시했는데 정말 진짜로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침대 주변엔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그 청년은 상반신 세미누드...(..)로 침대에 누워있고, 그가 보는건 그 청년의 잠든 모습인지 눈을 감은채 가만히 있는것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특이하다.
아마 이 청년 침대에서 영원히 못나오려나? 외국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던데. 하반신이 없는데 진짜로 살아있는듯 보이는게 신기하다. 필요한 부분만 보여주려는 걸까. 그가 보는 티비에서는 그 청년이 잠들어 있는데, 누워있는 시간이나 공간이나 그의 삶에서 잠들어 있는 시간을 말하는건지, 티비를 보다 잠을 자는걸 말해주는건지, 아니면 그 청년도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는건지, 그 모습을 외면하려고 하는건지 오묘하다. 그리곤 그 청년은 move! move 라고 말하고. 신기하네. 평생 아마 저기서 못나올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이 계속 드네. 비키라니. 채널을 돌려버리라는걸까. 아니면 자신의 모습보고 비키라고 하는걸까.
 뒷편. 디스플레이. 뛰는 사람들. 담벼락 하나를 촬영해 그곳을 뛰어가는 사람들을 촬영하고, 그 작은 블럭을 복사하고 복사해서 화면액정 한 가득 채운상태. 약간의 시차를 둬서 그 작은 공간을 뛰는 사람을 화면 전체를 뛰는 사람으로 탈바꿈 시킨다. 그래서 그 중 한 사람을 콕하고 찍어서 화면을 따라서 눈으로 그리는 그 느낌이 아주 오묘하다.
이것도 사생활일까. 운동하는 사생활의 영역과 촬영된 공적인 장소와 그 사생활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이 작품으로 디스플레이 되는 상황은 공적일까 사적일까. 

 다른방. 수영장과 바다가 인접해서 물이 첨벙첨벙하고 넘치는곳. 뭐야 이건. 수영장이 사적이고 바다가 공적인가. 아니 그 반대인가. 수영장이 왜 사적이지 ? 경계가 모호하고 이리저리 넘치고 결국 둘다 물인데.  오페라 하우스. 해질녘 전쯤에 아마 계단에 비치는 그림자를 촬영한 것 같은데. 그걸 겹친듯 하다. 저건 뭘까. 공적인 공간에 그림자는 사적인건가. 개인. 개인인가 ?  대화라는 제목으로 물속에서 무언가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얼굴을 클로즈업 한 작품도 있었다. 도와 달라고 말하는 건지 뭔지 잘 모르겠던데. 대화 단절같기도 하고 오히려 눈으로 보기만 하는데 대화가 되는것 같기도 하고.그 뒤에서 경기장인지 땀과 열기로 가득찬 곳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표정들을 클로즈업, 다시 슬로우모션으로 재생하는 장면들. 커다란 눈동자와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어서 언어말고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말보다 오히려 더 설득력있었다. 표정도 신기하고 왠지 모르게 눈동자가 강렬하게 잡아끈다.

애매모호하지만 시각적으로 무언가 단적인걸 말해주는게 많네.

작품에 대해 아는게 거의 없어서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느낀게 전부이긴 하지만 재밌었다.
도슨트 시간에 맞춰서 듣는게 아마 굉장히 좋겠지. 이미 한번 봤으니 편견을 갖게 될 이유도 없을테고.
설명을 들어야 하는것들이 굉장히 많았다. 한국작가분들의 작품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서 언급을 별로 안하게 된다.
현대사진으로 보이는 그 사진은 무언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듯 하고, 색도 너무 진한것 같기도 하고
아마 현대사진이라고 하면 아주 간단하고 오버노출에 대부분 하이키로 촬영되기도 하고.
채도가 진해도 아주 적은 내용을 가지고 있거나 하는거라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개인적으로 사진은 좀 애매모호했달까. 좀 달랐다.
특히 이건 도록에서도 크게 느껴졌다.
다른 미디어 아트 작품들은 디스플레이가 되어야 볼 수 있지만
사진은 도록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
근데 굿바이 스트레인저라고 하는 제목은 같은데 무언가 구성이 다른 사진들이 많아서.
그리고 도록에서 구성된 사진들은 무언가 2-3장씩 구성되어져서 서로 긴밀한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하는것 같았는데 전시는 조금씩 동떨어진 느낌도 있었고, 사진 자체에서 무언가 복잡한 구성이라는 생각도 들고, 추가적으로 그 곳에 사용된 소재. EBS의 로봇이 싸우는 홀이라던가 온게임 넷이라던가 하는 장소는 그 장소에 대해 조금이라도 어떤 정보를 얻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방송을 본 게 아니라면 그 작품을 이해하는데 약간의 장벽을 가질수도 있다고 생각됐다. 권력같은 것에 대한 도전이라던가 서로 싸우기만 하는 사회에서 인간을 나타내려 했다는 소개와 맞물리긴 했는데 무언가 한국적이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난간을 올라가는 여성들의 사진은 오히려 서양적인 느낌이 들긴했지만 조금 아쉬운 무언가가 있기도 했고. ( 아마 저명한 분들이 이글을 보면 침을 뱉으려나. )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라는 소재와는 분리된 다른 작품인 것 같다. 작품 설명을 봤는데 맞는듯 안맞는듯, 내가 이해 못한다고 저건 틀렸다고 생각하는건 멍청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란걸 알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뭔가 묘했다. 보수적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외국작가의 자유분방한 표현방식이나 그들의 표정같은게 오히려 나에게 설득력이 있었을수도 있겠네. 1시간인가 1시간 반동안 그곳에서 이리저리 구경을 했었는데, 6시 땡하고 헤어질 시간이라 한국작가분들 작품은 편하게 못봤다. 뭔가 거대한데 뭘 말해주는건지는 모르겠고 그저 신기한건가 하는 생각만들고. 영종도에 관한 미디어는 사회비판에 가까웠다. 그 지역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편안한 느낌의 다큐멘터리. 진짜 별다른것을 넣지 않은 스프같은 느낌. 장지아라는 작구분의 동공은 빛을 조절한다 라는 작품은 아주 짧게만 볼 수 있었는데 , 연극같기도 하고 신기하다. 쌔하얗게 질린듯한 남자의 얼굴에 비춰지는 불빛들과 그 남자의 눈물이 마치 과거속의 죄나 어떤 후회같은 것들을 플래시백처럼 빠르게 보여주는것 같아서. 와. 멋지다.

도슨트가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전시도록에는 아주 방대한 양의 텍스트가 있어서 그것을 본다면 아마 엄청나게 도움이 되겠지만 아주 얇은 두께에 만원. 작품들도 작게 프린팅 되어져서 볼만할까 과연. ( 여기도 마찬가지로 전시 사진과 프린트 사진에 차이가 있다. 채도나 선명도나. )
 개인적으로는 사진과 미디어 아트가 조금 다른것 같다는 것. 처음 보았던 이글루만드는 여성의 모습을 현대사진으로 작업했다면 형광등으로 밝혀진 공간에서 클로즈업해서 하이키로 그녀와 파일들을 잡아내고, 사람들의 표정을 과장하거나 아예 숨겨버리고, 마지막엔 청소기와 여자의 발목부분만을 잡았을까. 그것을 연작으로 내 놓았을까.
사진이 보여주는 단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번에 본 미디어아트 라는건 행위예술 같았다. 그러니까 무언가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 장면만을 연출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촬영하는 동시에 그것을 재현하는 그 행위 자체에도 중점을 두는 것. 메세지와 행위 그리고 그것을 보는 일반 사람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는 나무 뿌리같은 것이라고 느꼈다. 현재의 여러 작품과는 다르게 약간 흐린 화질과 단순화된 2채널 음향시설 ( 조금은 노이즈가 섞인 ) 그리고 핸디캠같은 흔들림과 과정없는 구성등등이 오히려 더욱 설득력 있고 그것이 정말 우리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마치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듯한 느낌을 더욱 잘 전해주었다고 생각된다.

재밌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